데이비드 차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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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차발라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잠비아의 축구 선수로, 골키퍼와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무풀리라 원더러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잠비아 국가대표팀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1985년 잠비아 올해의 스포츠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199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팀의 3위에 기여했다. 1993년 4월,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참가를 위해 이동 중이던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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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차발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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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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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풀 네임 | 데이비드 에포드 차발라 |
출생일 | 1960년 1월 28일 |
출생지 | 무풀리라, 북로디지아 |
사망일 | 1993년 4월 27일 (향년 33세) |
사망지 | 가봉 해안, 대서양 |
키 | 5 ft 11 in (약 180 cm) |
포지션 | 골키퍼, 스트라이커 |
유소년 클럽 | |
유소년 연도 | 1975–1977 |
유소년 클럽 | 루부토 아마추어 축구 클럽 |
클럽 경력 | |
클럽 연도 | 1978–1991 |
클럽 | 무풀리라 원더러스 FC |
출장수 | 643 |
득점수 | 0 |
클럽 연도 | 1991–1992 |
클럽 |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클럽 연도 | 1992–1993 |
클럽 | 무풀리라 원더러스 FC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 연도 | 1983–1993 |
국가대표팀 | 잠비아 |
국가대표 출장수 | 115 |
국가대표 득점수 | 0 |
2. 선수 경력
데이비드 차발라는 선수 경력 동안 클럽과 국가대표팀 모두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93년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공기 사고는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4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잠비아는 루사카에서 마다가스카르를 3-1로 꺾고 조별 리그 진출을 노렸다. 이후 모로코, 세네갈과 같은 조에 편성된 잠비아는 월드컵 진출을 기대했다. 199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에서 잠비아는 짐바브웨와 0-0으로 비기고, 포트루이스에서 모리셔스를 3-0으로 완파하는 등 좋은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3년 4월 27일, 잠비아 대표팀은 세네갈로 향하던 중 잠비아 축구 협회 회장 마이클 므와페를 포함한 탑승자 30명 전원이 사망하는 비행기 사고를 겪었다. 이 사고로 차발라를 비롯한 잠비아 선수들과 코치진 대부분의 경력이 끝났다.
차발라에게는 두 아내 조이스와 페트로넬라 므와바 물렌가, 그리고 6명의 자녀(조이스에게서 5명, 페트로넬라에게서 1명, 아들 이름은 칼라사 에포드 데이비드 차발라)가 있었다.
2. 1. 클럽 경력
데이비드 차발라는 무풀리라에서 태어났으며, 12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그는 스트라이커로 시작하여 무풀리라의 루부토 아마추어 클럽에서 뛰었고, 17세 때 우연한 계기로 골키퍼 경력을 시작했다. 훈련 중 주전 골키퍼가 없어서 차발라는 동료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골문을 지키게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골키퍼를 맡았지만, 매우 훌륭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골키퍼로 뛰는 것을 즐기면서 포지션을 변경했다.[3]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무엘 은들로부와 딕슨 막와자 코치에 의해 무풀리라 원더러스의 후보 골키퍼로 영입되었다. 그는 곧 1군에서 베르나르드 카브웨를 대신하여 1980년 7월 27일 무풀리라의 신데 스타디움에서 열린 루사카 타이거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했다. 전반전에 원더러스가 2-0으로 뒤진 상황에서 차발라가 카브웨를 대신 투입되었고, '마이티' 선수들은 3-2로 승리했다.[3]
차발라는 아숄스 멜루, 칼루샤 왈야, 프레데릭 카시모토, 필레몬 카운다 형제, 필레몬 물랄라, 그리고 나중에 찰스 무손다, 존슨 왈야와 같은 다른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원더러스에서 골키퍼로 활약했다. 이 원더러스 팀은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잠비아 컵 대회를 지배하며 '전설적인 컵 파이터'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더러스는 이 기간 동안 잠비아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1985년 잠비아 올해의 스포츠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1988 시즌에는 원더러스의 스트라이커 유니폼을 입고 많은 잠비아 축구 순수주의자들을 놀라게 했지만, 10월 독립 컵 결승전에서 원더러스가 로안 유나이티드를 3-0으로 이겼을 때 세 번째 골을 포함하여 다섯 골을 기록했다.[4] 1971년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또 다른 위대한 원더러스 골키퍼 아브라함 은콜레의 발자취를 따랐다.[5] 차발라는 골키퍼로 돌아갔지만 1990 시즌에 몇 경기를 더 뛰면서 다시 스트라이커 역할을 맡은 후 골문으로 돌아갔다.
1991/92 시즌에 아르헨티나에서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짧은 기간 활약했지만, 1992년 3월에 계약 조건이 불만족스럽고 구단이 이를 변경하려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원더러스로 복귀했다.[6][7]
1992년 12월, 차발라는 원더러스가 2-0으로 앞서던 상황에서 세 골을 내준 후, 니카나 레드 데빌스와의 독립 컵 결승전에서 교체되었다. 결국 원더러스는 3-2로 패했다. 그는 아숄스 멜루가 원더러스의 코치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경기를 팔았다는 소문에 실망했다. 멜루와 차발라 모두 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며, 그들은 좋은 친구이며 차발라는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그의 교체가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8][9] 그는 원더러스의 다음 다섯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곧 다시 자리를 되찾았다.
2. 2. 국가대표팀 경력
데이비드 차발라는 원더러스에서의 활약으로 국가대표팀 선발진의 눈에 띄어 1980년 11월 27일 잠비아 'B'팀 소속으로 동부 및 중앙 아프리카 축구 협회(CECAFA) 컵 3, 4위 결정전에서 말라위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치렀으나, 잠비아가 1-0으로 패했다.[10]그의 정식 국가대표 데뷔는 1983년 4월 10일 CAN 예선전에서 수단을 상대로 하르툼에서 열렸으며, 잠비아는 2-1로 패했다. 그 이후 차발라는 10년 동안 잠비아 골문을 굳건히 지켰다.[10]
1984년 CECAFA 시니어 챌린지 컵에서 잠비아를 이끌고 정규 시간 동안 득점 없이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3-0으로 말라위를 꺾고 우승했을 때, 3개의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198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잠비아의 골문을 지켰지만, 잠비아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10]
1987년 올림픽 예선에서 가나를 상대로 한 차발라의 활약은 잠비아가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잠비아는 홈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고, 아크라로 원정을 떠났으며, 홈 팬들은 자국 팀이 승리할 것으로 기대했다. 가나는 시작부터 맹공을 퍼부었고, 토니 예보아의 전반전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잠비아는 필사적으로 버텼으며, 차발라는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어, 에마뉘엘 콰르시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는 등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합계 2-1로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다.[10]
경기 후, 가나 골키퍼는 차발라에게 다가가 비결을 물었고, 차발라의 벰바어 답변은 잠비아 축구계에서 전설이 되었다. "Kuiposafye (그냥 몸을 던지면 돼)."[10]
올림픽에서 잠비아는 찰스 무손다가 미드필드를 조율하고 칼루샤 부왈리아가 파괴적인 활약을 펼치며, 이라크와 2-2로 비기고, 이탈리아와 과테말라를 4-0으로 완파하여 8강에 진출하는 인상적인 결과를 기록했다. 하지만 8강전에서 서독을 상대로 4-0으로 참패했고, 위르겐 클린스만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0]
그 실망에도 불구하고, 잠비아 국민들은 이 팀이 마침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는 수준의 선수들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홈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잠비아는 원정 경기에서 승점을 얻지 못했고,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10]
차발라는 199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도 출전하여, 기자들이 그를 토너먼트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했으며, 5경기에서 4번의 무실점을 기록하며 잠비아의 3위 달성에 기여했다. 그의 마지막 네이션스컵 출전은 1992년 세네갈에서 열렸으며, 잠비아는 8강에서 연장전 끝에 우승팀 코트디부아르에게 1-0으로 패했다.[10]
1992년 12월 20일, 잠비아는 월드컵 예선에서 마다가스카르에게 2-0으로 패했고, 이 결과로 예선 통과에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차발라는 팀에서 제외되었고, 다음 두 번의 예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잠비아 축구 협회(FAZ) 선거를 앞두고 지도부가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비난했다.[11] 므와페는 차발라가 소속팀에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컵 결승전에서 니카나에게 패한 이후 팀에서 제외되었다고 답변했다.[12] 이후, FAZ는 그가 다시 잠비아 대표로 뛰는 것을 허용했고, 그는 부상당한 리처드 므완자를 대신하여 즉시 국가대표팀에서 자리를 되찾았다.[10]
3. 사망
1993년 4월 27일, 데이비드 차발라를 포함한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3년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잠비아 대표팀은 월드컵 예선 조별 리그 진출을 위해 세네갈로 향하던 중이었다. 대표팀의 수송 수단은 잠비아 공군 DHC-5D 버팔로 비행기였는데, 리브르빌에서 연료를 보급한 후 비행기에 문제가 발생하여 바다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잠비아 축구 협회 회장 마이클 므와페와 공군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자 30명 전원이 사망했다.
온 국민이 충격에 휩싸였고, 사랑하는 팀의 유해가 담긴 30개의 관이 국장으로 운구되면서 비극의 규모가 실감되었다. 이 비행기 사고로 차발라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잠비아 선수들과 코치진 거의 전체의 경력이 끝났다.
차발라에게는 두 아내 조이스와 페트로넬라 므와바 물렌가, 그리고 6명의 자녀(조이스에게서 5명, 페트로넬라에게서 1명, 아들 이름은 칼라사 에포드 데이비드 차발라)가 있었다.
4. 수상 내역
4. 1. 클럽
차발라는 무풀리라에서 태어났으며, 12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그는 스트라이커로 시작하여 무풀리라의 루부토 아마추어 클럽에서 뛰었고, 17세 때 우연한 계기로 골키퍼 경력을 시작했다. 훈련 중 주전 골키퍼가 부재하자 차발라는 동료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골문을 지키게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골키퍼로서 매우 훌륭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골키퍼로 뛰는 것을 즐기면서 포지션 변경을 결정했다.[3]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무엘 은들로부와 딕슨 막와자 코치에 의해 무풀리라 원더러스의 후보 골키퍼로 영입되었다. 그는 곧 1군에서 베르나르드 카브웨를 대신하여 1980년 7월 27일 무풀리라의 신데 스타디움에서 열린 루사카 타이거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했다. 전반전에서 원더러스가 2-0으로 뒤진 상황에서 차발라가 카브웨를 대신 투입되었고, '마이티' 선수들은 3-2로 승리했다.[3]
차발라는 아숄스 멜루, 칼루샤 왈야, 프레데릭 카시모토, 필레몬 카운다 형제, 필레몬 물랄라, 그리고 나중에 찰스 무손다, 존슨 왈야와 같은 다른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원더러스에서 골키퍼로 활약했다. 이 원더러스 팀은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잠비아 컵 대회를 지배하며 '전설적인 컵 파이터'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더러스는 이 기간 동안 잠비아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1985년 잠비아 올해의 스포츠 선수로 선정된 그는 1988 시즌에는 원더러스의 스트라이커 유니폼을 입고 많은 잠비아 축구 순수주의자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10월 독립 컵 결승전에서 원더러스가 로안 유나이티드를 3-0으로 이겼을 때 세 번째 골을 포함하여 다섯 골을 기록했다.[4] 그는 1971년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또 다른 위대한 원더러스 골키퍼 아브라함 은콜레의 발자취를 따랐다.[5] 차발라는 이후 골키퍼로 돌아갔지만 1990 시즌에 몇 경기를 더 뛰면서 다시 스트라이커 역할을 맡은 후 골문으로 복귀했다.
그는 1991/92 시즌에 아르헨티나에서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짧은 기간 활약했지만, 1992년 3월에 계약 조건이 불만족스럽고 구단이 이를 변경하려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원더러스로 복귀했다.[6][7]
1992년 12월, 차발라는 원더러스가 2-0으로 앞서던 상황에서 세 골을 내준 후, 니카나 레드 데빌스와의 독립 컵 결승전에서 교체되었다. 결국 원더러스는 3-2로 패했다. 그는 아숄스 멜루가 원더러스의 코치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경기를 팔았다는 소문에 실망했다. 멜루와 차발라 모두 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며, 그들은 좋은 친구이며 차발라는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그의 교체가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8][9] 그는 원더러스의 다음 다섯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곧 다시 자리를 되찾았다.
차발라는 무풀리라 원더러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다음의 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 우승 횟수 | 우승 연도 |
---|---|---|
잠비안 컵 (인디펜던스 컵/모시 컵) | 2 | 1988, 1995 |
잠비안 챌린지 컵 (셸 챌린지 컵/BP 챌린지 컵/ BP 톱 에이트 컵) | 5 | 1984, 1986, 1994, 1996, 1997 |
히어로스 앤 유니티 컵 | 3 | 1985, 1987, 1988 |
챔피언 오브 챔피언스 컵 | 3 | 1985, 1988, 1992 |
채리티 실드 | 2 | 1992, 1993 |
4. 2. 국가대표팀
데이비드 차발라는 원더러스에서의 활약으로 국가대표팀 선발진의 눈에 띄어 1980년 11월 27일 잠비아 'B'팀 소속으로 동부 및 중앙 아프리카 축구 협회(CECAFA) 컵 3, 4위 결정전에서 말라위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치렀으나, 잠비아가 1-0으로 패했다.[10]그의 정식 국가대표 데뷔는 1983년 4월 10일 CAN 예선전에서 수단을 상대로 하르툼에서 열렸으며, 잠비아는 2-1로 패했다. 이후 차발라는 10년 동안 잠비아 골문을 굳건히 지켰다.[10]
1984년 CECAFA 시니어 챌린지 컵에서 잠비아를 이끌고 정규 시간 동안 득점 없이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3-0으로 말라위를 꺾고 우승했을 때, 3개의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198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잠비아의 골문을 지켰지만, 잠비아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10]
1987년 올림픽 예선에서 가나를 상대로 한 차발라의 활약은 잠비아가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잠비아는 홈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고, 아크라로 원정을 떠났으며, 홈 팬들은 자국 팀이 승리할 것으로 기대했다. 가나는 시작부터 맹공을 퍼부었고, 토니 예보아의 전반전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잠비아는 필사적으로 버텼으며, 차발라는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어, 에마뉘엘 콰르시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는 등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합계 2-1로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다.[10]
경기 후, 가나 골키퍼는 차발라에게 다가가 비결을 물었고, 차발라의 벰바어 답변은 잠비아 축구계에서 전설이 되었다. "Kuiposafye (그냥 몸을 던지면 돼)."[10]
올림픽에서 잠비아는 찰스 무손다가 미드필드를 조율하고 칼루샤 부왈리아가 파괴적인 활약을 펼치며, 이라크와 2-2로 비기고, 이탈리아와 과테말라를 4-0으로 완파하여 8강에 진출하는 인상적인 결과를 기록했다. 하지만 8강전에서 서독을 상대로 4-0으로 참패했고, 위르겐 클린스만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10]
그 실망에도 불구하고, 잠비아 국민들은 이 팀이 마침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는 수준의 선수들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홈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잠비아는 원정 경기에서 승점을 얻지 못했고,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10]
차발라는 199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도 출전하여, 기자들이 그를 토너먼트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했으며, 5경기에서 4번의 무실점을 기록하며 잠비아의 3위 달성에 기여했다. 그의 마지막 네이션스컵 출전은 1992년 세네갈에서 열렸으며, 잠비아는 8강에서 연장전 끝에 우승팀 코트디부아르에게 1-0으로 패했다.[10]
1992년 12월 20일, 잠비아는 월드컵 예선에서 마다가스카르에게 2-0으로 패했고, 이 결과로 예선 통과에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차발라는 결국 팀에서 제외되었고, 다음 두 번의 예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조치에 놀라지 않았으며, 잠비아 축구 협회 선거를 앞두고 지도부가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는 새로운 회장 마이클 므와페에게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1] 므와페는 차발라가 소속팀에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인디펜던스 컵 결승전에서 니카나에게 패한 이후 팀에서 제외되었다고 답변했다.[12] 이후, FAZ는 그가 다시 잠비아 대표로 뛰는 것을 허용했고, 그는 부상당한 리처드 므완자를 대신하여 즉시 국가대표팀에서 자리를 되찾았다.[10]
4. 3. 개인
수상 | 내용 |
---|---|
잠비아 올해의 스포츠 선수 | 1985 |
참조
[1]
웹사이트
David Efford Chabala – Century of International Appearances
https://www.rsssf.or[...]
[2]
간행물
Zambia National Team Appearance and Scoring Records
http://www.zambianfo[...]
Zamfoot
2012-11-09
[3]
뉴스
Alertness vital, says top keeper
Sunday Times of Zambia
1988-02-07
[4]
뉴스
Wanderers toast over 'Uhuru' Cup
Times of Zambia
1988-10-24
[5]
뉴스
Hail Wanderers
Times of Zambia
1971-10-11
[6]
웹사이트
African and Asian Players in Argentina 1st Level
https://www.rsssf.or[...]
RSSSF
2008-06-09
[7]
뉴스
Chabala nullifies Argies pact
Times of Zambia
1992-02-25
[8]
뉴스
Chabala, Melu at loggerheads?
The Weekly Post
1992-12-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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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u’s my friend, insists Chabala
The Weekly Post
1992-12-2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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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mbia Daily Mail
1988-02-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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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ked goalie spills beans
Times of Zambia
1993-01-06
[12]
뉴스
'Keeper Chabala now free to play
Sunday Times of Zambia
1993-01-17
[13]
웹인용
30명전원 사망
http://newslibrary.n[...]
199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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